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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역사속의 이야기 - 춘선과 유신 上

by 양화산장 2018. 11. 29.

때는 신라 제26대 진평왕 34년의 옛날로 올라간다.
따뜻한 봄 실실이 흘러내리는 가는 비가 개인 지도 이미 오래다.
해마다 제 때를 잊지 않고 돌아오는 대자연의 봄이 그 어느 곳이라 다르랴마는 해마다 풍년들어 나날이 기름져가는 서라벌 이 땅에 골고루 찾아온 봄바람은 태평연월을 노래하는 이 나라 백성들의 흥을 더 한층 돋구어줌에 족하였다.
이 때 어깨가 으쓱으쓱 젊음의 몸을 가슴 벅차게 느끼는 청년 세 사람은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말머리를 돌리어 알천강 푸른 언덕으로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불면서 걸어 나갔다.
강변 버드나무 가지가 나날이 푸르러가는 언덕 위에 말을 세우고 삥 둘러선 청년 세 사람은 모두 칼을 차고 화살을 메고 채찍을 들고 신라 서울에서만 볼 수 있는 화랑들의 늠름한 기품이었다.
이따금 불어오는 봄바람에 날리는 꽃잎이 눈앞을 가리어 준다.
무연한 들판에 고랑마다 푸르러가는 보리밭 위에서는 쌍을 지어 노래하는 종달새들이 하늘에 끄나풀로 매어 달린 듯 제자리를 날면서 지지배배거린다.
『여보게 모가대. 오늘같이 좋은날 어디 갑갑해서 배기겠나. 우리 경마나 한번 해보세.』
『여보게 산다라가 경마를 하자네 그려. 그래 어떤가 우기나?』
『산다라가 새 말을 사더니 말 자랑을 하고 싶은 생각이 나는가 보군 그래! 해보세.』
『자, 그러면 목표는 남산 밑이고 일등하는 사람은 한 턱 내기로 하세.』
『암…… 좋구 말구.』
『자, 나란히 서야지.』
『하나, 둘, 셋!』
세 사람은 일시에 박차를 들어 말의 허벅지를 걷어 찼다.
세 마리의 사나운 말들은 화닥닥 땅바닥을 차며 벼락같이 달렸다.
달아나는 말발굽 소리가 따가닥 따가닥 지축을 울린다.
말이 달리는 자리마다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흥진만장의 서라벌 교외는 먼지가 자욱하다.
화랑도 총각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제각기 있는 기술과 용맹을 기울이어 순식간에 남산 밑으로 다다라 가니 여기서 세 사람의 순서는 얼른 결정되고 말았다. 1등 산다라, 2등 모가대, 3등 우기나이다.
『아니, 산다라는 언제 그렇게 기술이 늘었나?』
『내 기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 좋아서 그랬지.』
『그러면 자네가 1등을 했으니 인제는 내기 실행을 해야지.』
『암해야지. 장부일언이 중천금이 아닌가….』
『자, 그러면 어디로 갈까…』
세 사람이 다 따로 마음 둔 곳이 있는 바 아니지마는 그대로 오늘은 특히 큰마음 먹고 고급 기생집으로 이름난 화영의 집을 찾아서 하루 저녁의 즐거운 위로를 받으려 했다.
산다라가 우선 앞장을 서서 동문 밖 화영의 집으로 쏙 들어가면서 뒤에 오는 두 사람을 불러들였다.
들어서기가 바쁘게 마중나오는 화영은 근 30되어 보이는 수수한 여인이었으나 특히 인상이 좋고 처음 만나는 기분이 쾌하였다.
아무리 술집이라 하되 하루도 빼지 않고 서라벌 장안의 굵직굵직한 손님을 수십 명이나 맞고 보내는 화영의 태도는 어디로 보나 그럴 듯이 점잖아 보였다.
오늘은 특별히 처음으로 찾아오는 젊은 손님 세 분을 후대하기 위하여 그중 조용하고 깨끗한 별관으로 인도한 화영은 있다가 기생 두 사람으로 하여금 주안과 풍류를 들려가지고 조용조용히 들어왔다. 화영이가 들어와서 친절하게 소개하는 기생 하나는 수정이요, 하나는 춘선이었다.
기생 두 사람 다 근방에서 보기 힘든 미인이로되 특히 춘선이는 아무도 넘겨다 볼 수 없는 울타리 안에서 저 홀로 곱게 피려는 한 떨기 꽃송이처럼 순결하고 화사하여 보였다.
어지간히 술이 취한 뒤 누구든지 마음놓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수정과 춘선이도 마음으로 젊은 손님 세 사람을 위하여 비위를 맞추어 대접하고 위로하여 주었다.
그 중에서도 산다라는 자기 옆에 조심스러이 앉아서 한 잔 두 잔 술을 권해 주는 춘선이를 보았고 노랑나비처럼 날개를 납신납신 춤을 추는 춘선의 아담한 그 자태에 눈을 흘려 보기도 했다.
일찍 한 번도 보아 온 적이 없는 춘선의 미모에 샛별처럼 반짝이는 두 눈과 서로 시선이 마주치기도 했다.
아니 보려해도 보고 싶은 두 남녀의 두 눈이 마주 칠 때마다 산다라는 자기만이 알 수 있는 가슴속의 색다른 느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눈치차림에 둔하지 않은 춘선이도 말없이 부르짖는 산다라의 사랑을 맞아들임에 총명한 두 눈동자를 영롱하게 굴렸다.
심지어는 자기 옆을 떠날 줄 모르는 춘선이가 자기 손을 끌어 잡아다녀 꼭 쥐여 주기까지 함이 아니냐.
따라서 산다라도 춘선의 다섯 손가락을 꼭 잡아쥐고 발발 떨며 있다가 이제는 밤도 반 넘어 깊어서 술도 얼큰히 취한지라 산다라는 그냥 슬며시 춘선의 손을 잡아 흔들면서 그의 집안 형편과 있는 집 거소까지를 물어보게 되었다.
알고보니 춘선이는 부모가 구몰하고 조모님의 슬하에서 가난한 살림을 하고있는데 집은 가마머리라고 하였다.
어느덧 새벽닭이 울기 시작했다. 그냥 얼마든지 눌러앉아 있을 수 없는 처지에 세 사람은 얼른 일어나서 그 자리를 피하듯이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그 후 산다라는 어느 날 저녁이나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는 번민에 붙들리고 말았다.
자나깨나 날이 갈수록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춘선을 그리는 생각에 사로잡힌 산다라는 이래서 되느냐 가슴에 손을 얹고 몸부림을 쳤다.
(도대체 춘선이가 무엇이길래 내가 이 모양이냐.)
하고 제딴엔 마음 깊이 반성도 했다. 그리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두 눈을 팍 감아도 보았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일개 기녀인 춘선이를 생각하다니 될 말이냐. 적어도 나는 신라의 아들이요. 이 나라 700년 사직을 떠 메일 귀한 몸이 아니냐. 부모의 훈공을 받들어서 이 나라를 빛내어야 될 신분을 잊어서야 되느냐.)하고 새 정신을 차리노라 무척 애도 썼으나 그까짓 그럭한 정신쯤은 잠시뿐이요 자꾸만 춘선의 아름다운 모습이 쉴새 없이 눈앞에서 아롱거림을 어찌하란 말이냐. 파도 같이 밀려드는 춘선의 생각에 피할 길 없었던 산다라는 마침내,
(에라 가자! 때는 봄이요, 나이는 청춘이다. 내가 춘선이 하나 땜에 내 일신을 아주 망쳐버린다면 모르거니와 세상에 나서 한두 번의 노름쯤이야 무슨 큰 죄 될 것이 있으랴 이것도 인생이요 한 토막의 과정이다.)
이리하여 그 날 밤 산다라는 남 모르게 말을 끌어내어 가만히 타고 쥐죽은듯이 고요한 장안을 지나 북문 밖으로 채찍을 쳤다.
가마머리 춘천의 집을 찾아 대문을 두드리니 불이 비치며 문을 열고 나와서 반겨 맞아주는 이는 춘선이었다.
『어머나! 나는 또 누구시라구. 서방님이 밤중에 이게 웬일이세요.』
『그동안 잘 있었나. 왜 나는 이 집에 못 올 사람인가.』
『온 천만에요. 너무 고마워서 말씀이야요. 집안이 누추하지만 어서 들어가십시다.』
이렇게 큰 마음 먹고 찾아간 산다라는 불빛처럼 빨갛게 타는 열정을 일시에 호소할 길이 없어서 앞에 마주 앉은 춘선의 손을 끌어 잡아당기며 무릎에 앉히우고 가슴 벅차게 포옹을 하면서 아무 말이 없다가,
『춘선이 미안하네.』
『아냐요.』
『그래 지금 남편은 없나?』
이렇게 노골적으로 묻는 질문에 춘선은 자기 일신 사정을 기탄 없이 하소연을 했다.
따라서 가세는 빈한하고 부모없는 역경 아래서 부득이 근 5년간의 화류계에 있었을망정 여자가 반드시 지녀야 될 절개만은 생명같이 지켜왔다는 진정을 들어볼 수 있었고, 또 시집을 가자하니 모두가 넘고 처져서 마음에 맞는 사내를 만나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설혹 만난들 도무지 믿지 못할 것이 남자 마음만 같아서 차라리 일생을 깨끗이 독신으로 지나기로 결심하는 것이 편하다는 이야기가 끝나자 산다라는 서슴지 않고
『그러면 내가 얌전한 사람 하나를 소개해 줄테니 만나 주려는가?』
『호호호… 누구십니까?』
『바로 여기 앉은 낼세 내야. 그래 어떤가?』
『온 천만에 농담도 분수가 있지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되지도 않을 일은 바라지도 말랐다구 서방님 같은 분이야 하늘과 땅 같아서 어디 어림이나 있는 말씀이세요.』
『하늘과 땅이라니 내가 땅이고 춘선이가 하늘이란 말이냐?』
『아냐요. 그런 말씀만 하신다면 나는 아무 말씀도 아니 할테니깐요.』
『………………』
『춘선이 말 들어봐―. 사람이란 본래 귀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냐. 그저 마음하나 서로 믿고 의리만 지켜간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테니 아예 걱정말고 내 말만 들어….』
『끝끝내 버리지만 않으신다면…』
『그럴 리가 있나.』
『서방님 마음 하나만 믿고 지낼테니 사랑해 주세요.』
이때 산다라는 이미 춘선의 입술을 더듬으며 가슴 가쁘게 춘선이를 꼭 껴안았다.
산다라와 춘선의 볼편 살과 살이 서로 마주 부빌 때 춘선은 어린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방울지어 떨어졌다. 따는 그럴 만 하다. 근 오년의 화류계에서 온갖 사내를 상대로 하여 마음에 없는 웃음을 팔며 지나왔지만 오늘이야 비로소 사내다운 사내를만난 감격에 서려
『서방님 영원히 사랑해 주세요. 저같이 천한 계집을 어떻게 보시고 이러하시는지 알 수 없사오나 서방님은 왕실에 귀하신 몸으로 태어난 분이시고 저는 노류장화에 천한 몸인지라 만일 후에 버림을 받는다면 저는 닭 쫓던 개와도 같이 될 것이 아닙니까.』
『자네는 그렇게도 내 마음을 못 믿나?』
『황송합니다. 고마워요. 부디 크게 성공하세요.』
이런 말이 끝나자 두 남녀는 따끈하게 데워온 약주잔이 오락가락 달콤한 젊음의 핏줄에 정도 통하여 행복된 이 시간에 밤가는 줄 몰랐다.
밤은 깊어 불은 꺼졌다.
여기서 처음 맞는 하루 밤의 두 남녀는 이미 남과 남이 아니었다.
이런 일이 시작된 후로는 산다라는 사흘이 멀다하여 춘선이를 찾았다.
춘선이는 이미 기적에서 이름을 떼고 동문밖 모시마을 깨끗한 곳에 조그마한 집 하나를 차지하고 남같이 여염집 살림을 시작했다.
마당가에 마굿간 한 채를 지어 놓은 지도 벌써 오래다. 산다라는 저녁밥을 먹기가 바쁘게 이웃 친구집 사랑으로 글공부를 간다고 어머니를 속인 다음 집을 떠나감도 예사로 했다.
이것은 누구나 알 사람이 없었다. 산다라와 춘선이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 비밀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사정은 호사다마라 했다. 재미나는 골에 범 난다고 이렇게 어머니를 속여가면서 젊음의 불을 찾는 산다라의 비밀 행위를 눈치 채린 한 하인 아이의 주책없는 발언에 그가 여지없이 탄로되고 말았다.
하인 아이의 입을 빌어 산다라의 비밀을 모조리 알게 된 어머니는 어느 날 저녁에 아들을 눈앞에 불러 앉히고 서리가 돋게 노려보다가
『너 요즘에 밤마다 어디로 가지 ?』
『………………』
『너는 요즘에 어머니를 속이는 일은 없느냐?』
『………………』
『왜 대답이 없느냐! 대답을 못함에는 반드시 괴로운 일이 있을게다. 말해 봐라.』
『제가 철없이 어머님을 속이고 못갈데를 가면서 공부를 게을리 했습니다.』
『응… 그럴게다. 어머니도 죄다 듣고 알았다. 네 이제 물어봐라. 네 어미는 너 하나를 남같이 공부시켜 출세시키기 위하여 벌써 몇 해를 두고 후원에 제단을 모아 밤마다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올린다. 너는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
『……………』
『추운 날 더운 난 할 것 없이 네가 장차 커서 이 나라에 없지 못할 영웅이 되어 백제와 고구려를 쳐부수고 삼국통일 완성을 보게 해줍시사 하고 진정으로 기도를 드리는데 너는 저녁마다 그 어미를 속이고 술장사 계집애 집으로 출입을 한다니 그게 네 마음에 옳다고 생각하느냐?』
대답이 없는 산다라의 두 눈에서는 커다란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이것을 보고 어머니는 더한층 냉정하게
『유신아, 네 어미가 너를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은 너의 천하 성공을 바라는 탓이지 결코 한 개 색주가의 천한 계집애 남편이 되라는 것이 아님을 아느냐.』
하며 눈을 매섭게 뜨며 유신을 보니 유신은 겨우 흐르는 눈물을 거두고,
『어머니, 죽을죄로 잘못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그런데 아니 갈 테니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하고 백배사죄할 때에
『정녕 그럴까? 네 집으로 말하면 신라의 훈벌 세가로 치는 재매정댁이 아니냐. 또 예전 가라왕의 후손이 아니냐. 더구나 지금 너의 부친은 나라의 북변을 지키기 위하여 머나먼 곳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계실 뿐 아니라 지금 나라 형편이 백제 고구려의 침범을 막기 위하여 신통한 인재를 구하고 있는 때가 아니냐. 그렇다면 네가 이제 당치 않은 주색에 눈을 뜨다니 그것이 될 말이냐!』
하면서 무섭게 꾸짖었다.
『어머니 잘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데 아니 가겠사오니 용서해주세요.』
이렇게 맹세하는 유신의 두 눈에서는 계속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산다라의 부친은 산다라를 잉태할 때에 경신날 밤에 두 별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그 부인 만명은 신축날 밤에 동자가 금갑을 입고 구름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이렇게 부부가 다 길몽을 꾸고 옥동자를 낳았는데 아이 생김이 매우 비범하였다. 경진날 밤에 꿈을 꾸고 얻은 아이니 경자 비슷한 유자에다가 진자와 음이 비슷한 신자를 따서 그 이름을 유신이라 지었다.
그런데 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은 세상에 보기 드문 현부인이었다. 그리고 아들 유신을 위하여 인자하면서도 성품이 엄격하였다.
따라서 김유신의 놀고 공부하는 자리까지를 엄히 감시하였던 것이다.
『오냐 사람 쳐놓고 어디 한번 실수야 없을까 보냐. 고치면 그만이니 앞으로 각별 조심하여라.』
말끝에 서리가 돋은 어머니 훈계를 받고 돌아 나온 유신은 생각해 보매 참으로 딱한 사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춘선이를 어찌한단 말이냐! 벌써 여러 달 동안이나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이고 잠시를 못 보아도 죽을 것 같은 춘선이를 버리고 어떻게 지나랴. 죄없는 춘선이를 까닭없이 버린다면 그것 역시 나에게 죄될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어머니 은정이 중하냐 연인의 애정이 중하냐. 두 가지를 눈앞에 걸고 손수 재판을 내리려 했으나 그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날 친구가 장가를 간다해서 그 집으르 잔치를 먹으러 찾아갔다. 여러 친구와 같이 마음대로 먹고 술 마시고 한바탕 유쾌하기 놀다 보니 술이 잔뜩 취하였다.
나중에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잔등에서 그만 꾸벅꾸벅 잠이 들었다. 말은 제멋대로 걸어가서 길에 익은 춘선의 집을 찾아가고 말았다.
춘선은 오랫동안 오지 않던 유신에게 속이 바짝 타도록 토라진 판이다.
『애고 서방님, 오늘은 웬일이세요?』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뜨니 춘선의 집이라 기가 막혀 말을 내리니 춘선은
『어쩌면 그다지 사람이 냉정하세요?』
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
『춘선이 부끄러운 말이오마는 이제부터는 나를 잊어주오. 나도 남의 자식인지라 어찌 부모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오. 내가 춘선이 때문에 불효자가 된다면 춘선이도 그것을 원치 않을 것이니 자네도 섭섭하게 생각말고 오늘부터 아주 단념하여 주시오.』
『서방님 그러면 이제 나를 버린다 말이오.』
『난들 어찌하오. 마음이 있는 춘선이를 버리려는 내 마음인들 오죽 하겠소. 그러나 나도 사람이니 어찌 어머니 말씀을 거역해서까지 춘선이를 사랑할 수는 없지 않겠소.』
이때 춘선이는 몸부림을 치면서 한사코 유신의 팔 소매를 붙들었다. 그러나 유신은 기어이 말을 끌고 밖으로 나와 올라앉았더니 말은 몇 걸음을 못 가서 다시 춘선의 집을 향하여 되돌아서 걸었다..
그때 유신은 허리에 찼던 칼을 빼어들고 용서 없이 말의 목을 쳐 갈겼다.
『내가 오늘 여기 온 것도 너 때문인데 아무리 짐승이라 하기로니 그렇게도 주인의 심정을 몰라주더란 말이냐.』
하고 유신은 돌아서서 자기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리하여 유신은 춘선이와 인연을 끊고 말았다.
유신이 돌아간 뒤에 춘선이는 떨어진 말 목을 붙들고 목을 놓아 울었다.
온 몸에 피투성이가 된 춘선은 아무리 땅을 치며 통곡을 하되 이미 사라져간 임은 다시 올 리 없었다.
그 뒤에 춘선이도 냉정하게 생각하여 보았다.
(과연 유신은 다만 나를 사랑하는 일개 청년이 아니라 장차 이 나라 이 민족을 살려주는 천하명인이 아니냐―.
그렇다면 나는 그를 웃는 낯으로 보내자. 조금도 원망말고 저주해서 안된다. 일시나마 그러한 영웅을 남편으로 가졌던 것이 그 얼마나 영광이냐. 나도 이제부터 그와 못지 않게 공부를 하고 도를 닦으면서 일편단심으로 그의 성공을 기도 드리자.)
이렇게 단념하는 동시에 스스로 위로했다. 그 뒤에 조모는 돌아가고 동생은 시집보낸 다음, 오직 한 몸으로 되어버린 춘선이는 절간을 찾아갔다.
머리를 박박 깎고 여승이 되어 건덕사 정명화상을 찾아 도를 닦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춘선은 언제나 부처님을 모시고
『유신 서방님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축원을 드릴뿐이다. 애인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선 유신은 애마의 목을 베어 버리고 돌아왔으나 마음은 쓰리고 아팠다.
인간으로 못할 짓을 하였음을 번연히 알면서도 어쩌랴. 애인보다 어머니가 중하고 어머니 말씀대로 나라를 위하자는 대의에 서서 유신은 단연코 밟아야할 큰 길을 밟고 나섰다.
이러한 소문이 수일 내로 장안에 퍼졌다.
그러자 듣는 사람은 다 유신을 효자니 남자니 하면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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