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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요씨, 조선년 하나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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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서부의 고봉인 가야산 지맥에서 서 쪽으로 뻗어 내린 부춘산은 일명 북주산이라고도 부른다. 송림과 기암이 잘 조화되어 천연적인 휴식공원으로 손색이 없는 이 산에는 돌로 축성된 길이 540여m의 산성이 있었으며, 기슭에는 국조인 단군의 영정을 모신 단군전과 조국을 수호하다 산화한 700여 위패가 봉안된 충령각, 삼선암, 관음사 등 4개의 사찰이 자리해 있다. 
 이 산 최고봉에는 선녀가 가야금을 뜯는 형상의 옥녀봉이 있는데 옥녀봉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일본이 강제로 한일합방을 체결한 직후의 일이었다. 서산읍에는 일본인 소유의 금광 이 하나 있었는데 한창 번성해 나갈 무렵 오랜 장마가 계속되어 작업이 중단되었다. 덕분에 밤낮없이 작업에 시달리던 조선인 광부들은 모처럼 휴가를 얻은 기분이었지만 이들을 부리는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구멍 뚫린 하늘이 원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비를 멈추게 할 수 있을까 별 궁리를 다해보았지만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때 한 작업반장이 솔깃한 제안을 했다. 
"처녀를 한 명 제물로 바치고 제사를 지 내면 비가 멈춘다는 말이 있습니다." 
"처녀를 제물로 바치면 비가 멈춘다?" "그렇스므니다." 
"요씨.. 비가 빨리 멈추지 않으면 일 못 해서 손해 보는 것은 둘째치고 광산이 무너 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나는 망하는 거 야. 비만 멈춘다면 그까짓 조선년 하나쯤이 야 희생시킬 수도 있지." 
제물로 올릴 희생양으로 뽑힌 처녀가 옥녀였다. 홀어머니를 모시며 어렵게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착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었던 옥녀로서는 지레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현실보다 병약한 어머니를 홀로 남겨 놓고 떠난다는 것이 더욱 가슴 아팠다. 주권 잃은 나라 백성의 목숨은 축생과 다름없이 취급되어도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었다. 마침내 제를 올리는 날이 돌아왔다. 머리를 곱게 땋아 빨간 댕기를 두른 옥녀가 제물대에 올랐다. 굵은 빗줄기 사이로 펄럭이는 옥녀의 하얀 치마저고리는 핏빛 아우성 같았다. 
그녀는 그렇게 죽었다. 그리고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이 맑게 개였다. 작업이 재개되자 금광에서는 갑자기 금이 무더기로 발견 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소문은 금세 마을 밖으로 퍼져나가 일본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런데 똬리를 틀고 있던 큰 구렁 이가 몰려든 일본인들을 향해 독기를 내뿜었고, 그것을 호흡한 일본인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광부들에게는 독기가 닿지 않아 모두 무사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죽은 옥녀가 뱀으로 환생하여 복수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옥녀의 어머니는 죽어서도 극락에 들지 못한 딸을 위해 백일 동안 천도제를 지냈다. 그 마지막날 옥녀는 뱀의 탈을 벗고 무 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 후 산봉우 리 이름을 옥녀봉이라 지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런 전설 때문에 주민들은 특별히 이 산 을 신성시하여 산소를 쓰지 않고 있다. 옥녀 제향의 전설은 배일사상을 근거로 하고 있어 일제시대에는 옮기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통제된 바 있었다. 지난 1987년 서산문화제가 시작되면서 격식을 제대로 갖춘 옥녀제 가 부활되었다. 서산문화제 기간이 되면 옥녀 전설비가 건립된 산 중턱에서 매년 서산시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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