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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옛 이야기(고전) - 공민왕의 비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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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세상맛을 본 신돈은 이번에는 정식으로 부인을 얻을 생각을 하였다. 당시 문벌이 좋다는 이경상의 처 김씨를 보고자 그의 집에 불렀다. 김씨는 응하여 들어왔다. 세상을 강박하게 본 까닭에 처음부터
『부인 들으니 요새 과부가 되었다 하는데 나하고 같이 살면 어떠하오』
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갔다.
『무슨 말씀이요. 세상이 아무리 혼돈하다 하여도 문벌 있는 집안에서는 쉽사리 재가하지 않소.』
『홀로 무척 적적하지 않소.』
『우리 남편은 살아있을 때 남의 계집이나 유녀 같은 것은 평생에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이요. 그러한 남편이 죽자 개가하다니 말이 되오.』
『쓸데없는 고집을.』
신돈은 음흉한 눈으로 여자를 흘겨보았다.
『도첨의께서 나에게 손을 대시면 나는 자살할 생각이요.』
말을 마치자 그 자리에서 머리를 싹 잘랐다.
신돈은 아무소리 않고 정열부인감이라고 칭찬하며 내보냈다.
이러한 반면이 있는가 하면 당시 음란한 풍속은 심하여 국가의 멸망을 독촉하는 듯 하였다.
그는 매일 궁궐에 출입할 때 궁궐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편하여 궁성 뒤 조그마한 문을 내고 그리로 출입하였다. 바로 궁궐 뒤에 봉선사가 있어 이 절을 넘어서면 궁궐 담쪽으로 공지가 있었다. 이곳은 한적하여 사람의 왕래가 없다. 신돈은 이러한 곳을 택하여 조그마한 집을 짓고 그 곳에서 살았다. 그 목적은 궁궐 뒷문으로 왕을 받들기 위하여 지어놓은 것이다.
왕은 세상사람들이 신돈의 처소에 드나든다고 하므로 세인의 눈을 피하여 뒷문으로 나가 신돈의 처소로 들어갔다.
신돈은 왕을 안내하고 부처님 앞에 꿇어앉아 분향하며 합정하고 묵묵히 속으로 불경을 읽었다.
향연이 서리고 올라가는 곳에 이 세상의 모든 욕심을 불살라 버리는 듯 하였다. 왕은 신돈의 이러한 생활을 보자 더욱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신돈은 왕에게 불교에 대한 이야기와 정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이러한 조용한 곳에서 항상 상주하였다.
왕이 돌아간 후에는 자기 홀로의 세상이다. 조그마한 방은 일종의 선방으로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다. 오직 선방밖에 따로이 사는 기현의 처만이 출입하였다.
이러한 것을 아는 엽관배들은 우선 기현에게 통하고 다시 그의 아내에게 통하여야만 신돈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조용한 중에도 기현의 처소에는 문전 성시할 지경이었다.
왕은 이러한 것도 모르고 때때로 신돈의 처소에 나와 반야라는 여성을 품안에 넣었다. 그후부터 반야에게 매월 쌀 두 섬을 하사하라고 하였다.
신돈이 정권을 잡은 후 자기의 반대당을 일소하며 점차로 자기의 당파를 만들어 조야에 세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것이 왕으로 하여금 가장 꺼리게 한 원인이다. 신돈도 그 동안 왕의 여러 가지 행동이나 성질을 알았으므로 언제 신돈 자기도 무슨 일에 걸려들어 죽을는지 알 수 없었다.
공민왕 21년 왕이 헌릉과 경릉에 거동할 때 신돈은 자기의 부하들과 같이 큰 일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의 의위가 굉장하여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다. 이러한 기미를 알게되자 이인은 왕의 생명이 위태로운 것을 직감하고 밤에 재상 김속명의 처소로 들어가 투서하고 도망갔다. 김속명은 즉시 왕에게 상주하자 왕은 반신반의하였으나 그래도 가만히 있지 않고 신돈의 당 기현을 잡아 국문하게 되었다. 여기서 일은 탄로나 신돈의 일당을 모조리 죽이고 신돈도 죽이었다.
신돈이 죽은 뒤에는 왕은 수시중 이인임을 믿게 되었다.
『여보 이 시중 나는 이제 언제 죽어도 한이 없소.』
매우 쓸쓸한 말이다. 이인임은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전하 춘추 정정하신데 황공한 말씀을 하시오니 무슨 뜻이오.』
『시중 나는 그 동안 후사가 없어 항상 걱정하였소. 궁중에 혜비, 익비, 정비 등이 있었으나 모두 소용없었소.』
『황공하오.』
『그런데 전번에 신돈의 집에 갔다가 거기 아름다운 여자가 있어 그 속에서 무니노(모니노)를 낳았소. 내가 석가모니를 믿다가 낳은 아인 까닭에 무니노라고 이름지었소. 내가 죽은 후에 시중이 잘 맡아 보살펴주오.』
『망극할 따름이오. 어찌 어의를 저버리겠읍니까.』
이로써 무니노는 궁중으로 들어와 명덕태후 궁에서 길렀다.
그 동안 여러 여성을 대해보았으나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공주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되어서는 몸도 튼튼한 편이었으나 그 후부터 술을 과음하여 몸은 더욱 쇠약해지고 간혹 후궁 방에 들어가면 음란한 여성들은 왕을 못 살도록 도전하였으나 후손을 얻지 못하였다.
『예라 여자는 일체 가까이 하지 말아야지.』
이러한 결심을 한 후 자제위라 하여 나이 젊고 잘생긴 미남자를 선택하여 모집하여 왕의 좌우에서 시중케 하였다. 자제위로 말하면 모두 미소년들이었다. 당시 자제위 중에 뚜렷한 자는 남운과 한설 등이었다. 이 자들은 항상 왕의 침전에서 일하며 궁내에서 살았다.
당시만 하여도 몽고에서 들어온 풍속이 심하여 소위 용양(동성애)이 유행하였다. 때로는 이 자제위들이 용양의 대상자가 되기도 하였다.
왕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전날 공주의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럴수록 마암의 공주의 영전은 너무 화려하게 짓는 까닭에 쉽사리 되어가지 않았다.
자제위들은 왕의 좌우에서 모시고 다니느라고 후궁이나 왕비의 방에 자주 출입하였다.
한편 익비는 왕이 수차 자기 침전에 드나들었으나 한번도 깊은 사랑의 감미를 맛보지 못하였다.
어느 날 어명이요 하고 남운과 한설이 익비의 처소로 들어왔다. 오래간만에 왕의 거동이 있는 줄 알고 익비는 뛰어나와 맞이하였다. 남운이 나서며
『거동이 뒤에 오시오』
하며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하였다.
『어서 들어오시오. 상감은 어디 계시오.』
『지금 바로 정비 방에서 나오시고 있소.』
익비는 옷을 갈아입고 왕을 기다렸으나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럴수록 남운은 익비의 침전 깊숙이 들어가며
『어서 음식을 차리도록 하오』
하고 방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익비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음식상을 차려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익비 마마 앉으시오. 상감보다도 우리가 마마에게 여쭐 말씀이 있소.』
『무슨 말인지 말해보오.』
그래도 남운은 머뭇거리기만 한다.
『술이나 한잔 먹고.』
옆에서 한설도 맞장구치며 가져온 술을 마신다.
『우리들은 상감을 모시고 다니기에 늘 시장하답니다. 마음씨 고우신 익비 마마나 우리에게 음식을 주지만은 비빈들은 생각도 않습니다.』
『시장하시면 가끔 들어오구료. 있는 대로 대접할 터이니.』
『아이 고마워라.』
두 사람은 서로 권해가며 술을 마시었다. 그래도 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익비의 마음은 조바심이 났다.
『어째 상감께서 거동이 늦으시오.』
『정비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요.』
어디까지나 비위좋은 말씨이다. 술을 더 가져오라 하여 또다시 마시었다.
『이제 고만 가시오.』
익비는 자제위를 쫓아낼 생각을 하였다.
『갈 데가 없읍니다. 여기서 자고 가겠읍니다.』
『안될 말 말고 어서 나가오.』
이때 남운이 일어나 익비의 손목을 턱 잡았다.
『이게 무슨 무엄한 짓인고.』
준절히 나무래며 손을 뺄려고 하였다. 그러나 힘찬 남자의 기운은 당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익비는 큰 소리를 지르며 반항하였다. 그러자 한설이 벌떡 일어나 익비의 입을 막았다. 이제는 형세 위급하게 되었다. 다음 순간 익비는 남운의 품안에 안기고 말았다. 반항해 보아도 그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다만 한숨만 쉴 따름이었다.
부패한 궁중은 난음이 마음대로 활개쳤다.
이러한 일이 있던 후 남운은 무엇이 부족한지 가끔 찾아들었다. 그럴수록 익비는 흉한 벌레나 대한 듯 징그러워했다. 이런 중에도 익비의 뱃속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고 있었다.
어찌하면 좋을까 몇 번이고 생명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그런 일도 쉽사리 되지 않았다.
어느 날 왕은 자제위를 데리고 노국공주의 정릉으로 나갔다. 푸른 소나무 속에 우뚝 솟은 정만이 왕을 반겨주는 듯 하였다. 아직 마암의 영전이 못다 된 것이 마음에 걸리었다. 내시 만생을 불러놓고 분부하였다.
『만생아 가지고 온 물건을 내놓아라. 공주의 상석 앞에 놓고 제사나 드려보자.』
『예이』
소리와 동시에 만생은 제물을 늘어놓았다. 왕은 그 앞에 가만히 합장 배례하고 앉아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공주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용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옆에서 보던 자제위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었다. 아무래도 무슨 변이라도 날듯 하였다.
『상감마마 환궁하사이다.』
최만생이 하는 말에 임금은 일어나 다시 산소 앞 잔디에 앉는다.
『만생아 차려놓은 제수를 가져오너라.』
『예이』
대답과 동시에 석상 위에 놓은 주과포를 가져왔다. 임금은 손수 술을 부어
『공주 내가 왔소. 같이 먹읍시다.』
한 후 술을 산소 위에 뿌렸다. 이미 간 공주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럴수록 왕의 단장의 슬픔은 복받치어 올라왔다. 다시 술을 부어 역시 권하며 뿌리었다.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다. 다만 석양노을에 까마귀 지저귀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상감 환궁하시오.』
재촉하여도 그대로 앉아있다.
『가지고 온 술이나 먹자.』
이 말에 자제위들이 다시 생기가 난 듯 모여들어 왕과 같이 먹었다. 술을 먹을수록 왕의 마음은 더욱 서운하였다. 한번 술을 입에 대면 왕은 술이 다 없어지도록 마시었다. 나중에는 모두가 취하였다. 비틀걸음으로 밤늦게 환궁하였다.
9월의 늦은 가을은 쓸쓸하며 벌레소리 더욱 처량하게 들릴 뿐이다.·왕은 오늘 술을 과음한 탓인지 좀처럼 술이 깨지 않았다. 동천에는 하현달이 으슴프레 올라왔다. 밤이 깊은 것을 말한다.
『만생아 뒤가 급하구나 뒷간에 가야겠다.』
어명을 들은 만생은 대답하고 동롱에 촛불을 대려가지고 왕을 모시고 나갔다. 바깥 밤은 쌀쌀하였다. 왕은 술이 취해 고개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다. 만생도 저녁때 먹은 술이 아직 덜 깨 무슨 말이든지 하고 싶었다.
『상감마마 좋으신 일이 생겼나이다.』
『무슨 일이냐.』
『저 듣자온대 요새 익비 마마가 애기를 가졌다 하옵니다.』
『어』
놀래는 기색이었다.
『몇 달이라더냐.』
『다섯 달이라 하옵니다.』
『잘되었다. 공주의 영전을 부탁할 사람이 없더니 잘되었다.』
임금은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잠시 손을 꼽아보고 있었다.
『그럼 누구하고?…···』
『남운이라 하옵니다.』
『알겠다. 내일 창릉 거동할 때 남운이를 아주 없애야겠다. 누가 또 아는 사람이 있느냐.』
『아무도 없읍니다.』
『그래. 그렇지만 네놈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네놈의 입도 없애야겠다.』
이 말에 만생은 깜짝 놀라며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를 하여 목이 달아날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스러운 순간이었다.
만생은 왕을 침전으로 모셔다놓고 즉시 남운이 자는 방으로 뛰어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이거 큰일났다. 어찌하면 좋으냐. 우리가 모두 죽을듯하다.』
이러한 말을 하며 살아나갈 방도를 의논하였다.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별수 없다. 우리가 선수를 써야겠다.』
자제위들은 결심하고 만생을 앞장세우고 왕의 침전으로 들어갔다. 왕은 술에 취하여 코를 골며 세상모르고 자고있다. 만생이 앞에서 도둑고양이 모양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침전의 문을 열었다. 침상에 누운 왕은 여전히 코만 골았다. 그 순간 만생은 가지고 간 칼을 들어 왕의 머리와 목을 쳤다.
『으악--』
소리와 동시에 붉은 피는 튀어 벽이 삽시간에 벌개졌다. 그때도 왕은 꿈틀거리며
『공주--』
소리를 하였다. 뒤미처 남운, 한설 등이 칼로 난자하였다.
왕은 다시 아무 말 없이 원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고 저 세상으로 공주를 따라갔다. 피에 물들인 방안은 비린내와 술 냄새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왕의 용안은 고이 잠든 듯이 다시 수년 전의 온화한 얼굴로 변했다.
한참 후에야 최만생이 먼저
『도둑이야, 도둑이 들었소』
하며 밖으로 뛰어나왔다.
『도둑이 어디 들었냐』
할 때 최만생, 남운 등이 밖에서 뛰어들어오며
『지금 저편 담으로 넘어갔소』
하였다.
밤중의 도적 소리를 듣자 궁궐을 지키던 위사들은 벌벌 떨며 움직이지 못하였다.
얼마 후 시중 대신 등이 급급히 침전으로 들어왔으며 계속하여 왕의 어머니 되는 명덕태후가 들어와서 왕의 참혹한 모습을 보자 통곡한다.
궁중에서 숙직하던 관원들도 무서운지 한사람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얼마 후 새벽이 되었다. 태후는 뒷일처리를 위하여 어린 강녕대군(모니노)를 데리고 침전으로 들어와 원로대신 등과 도적 잡을 의논을 하고있었다.
『아무래도 도적은 밖에서 온 것이 아니라 궁 안에 있으면서 한 짓 같으오.』
『지금 궁중에는 중 신조가 있어 이 자가 여러 가지 계교를 잘 내는 자요. 우선 이 자를 가둬두어야 하오.』
즉시 신조를 옥에 잡아넣었다.
또한 여러 대신들이 있는 곳에서 환관을 불러 한 사람씩 조사하였다. 그중 최만생의 옷고름에 핏자국이 조금 보였다.
『만생아 거기 있거라』
할 때 벌써 얼굴이 백지장같이 되었다.
(옳지 이놈이구나)
하는 생각이 번뜻 들었다. 하나만 잡으면 일은 쉽다. 그의 연루자 자제위를 모조리 잡아넣었다.
국가의 중대한 일은 후사를 결정하는 일이다. 태후는 종친 중에서 왕을 뽑자고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은
『수년 전에 대행하신 전하께서 유일한 혈속인 강녕대군을 세우시라고 하셨소』
하자 모두 그대로 순종하였다. 이때 강녕대군은 열두 살로 즉위하였다.
다음날 최만생, 남운 등 자제위를 역적으로 몰아 죽였으며 공민왕의 유해는 바로 노국공주의 능 옆에 나란히 쌍분으로 모시었다. 공주의 능은 정릉이고 왕의 능은 현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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